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는 성숙한 태도 때문에 고로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를 좋아한다. 카메라는 계절이 지나 베란다의 자란 이파리들을(아무도 모른다),  몇 년 만에 아들이 다시 찾아온 아버지의 집 계단(걸어도 걸어도)을 살핀다. 사건을 이야기하는 영화는 많지만, 사건을 둘러싼 시간을 부드럽게 다루는 영화는 흔하지 않다. 단순한 일로만 여겨졌던 사건은 곧 주인공들이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의사의 실수로 서로 다른 집안의 아이가 바뀌거나(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배 다른 네 자매가 한 집에 모여 사는(바닷마을 다이어리) 일이 갈등의 연속인 막장드라마로 빠지지 않는 이유다. 자전적인 소재를 주로 다루는 그의 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삶을 함께 살면서 견디는 느낌을 받는다. 사건은 해결이 중요하지만, 시간은 멈출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최근 극장에서 위와 비슷한 경험을 하였다. <우리들>은 시간이 지나 잊혀질 수 있는 어린 시절을 관객에게 섬세하게 드러낸다. 어른이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고, 안색이 좋지 않다고 물어보아도 아무 대답도 못했던 그 어리숙한 시기 말이다. 옷차림을 이유로 왕따를 시키고, 칠판에 나만 아는 사실을 폭로하는 교실의 현장에서 친구는 꼭 필요했다. 하지만 공들여 시작하다가도 한 순간에 망가지는 관계를 이해하기에 그 때는 너무 어렸고, 몸으로 겪는 대가는 치명적이다. 우리가 '좋던 시절'이라고 회상하던 순간들은 사실 전부 잔인했다. 그 땐 교실 밖으로 도망칠 수도 없었고 어른들은 아이들이 싸우면서 큰다고 생각했다. 5월의 "우리들"은 푸르지 않았다. "왜 말을 안해?"라고 물어보면서 아이를 이해 못할 존재로 보던 부모님과 선생님에게 <우리들>은 완벽한 대답이다. 감독은 어른이 되어서도 고민한 끝에 이 영화를 건져냈다. 

단순히 '누구나 어렸을 때 겪는 이야기'로 치부할 수 없기에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을 졸였다. 어른은 아이들 사이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시간이 지나 다시 한 자리에서 모여서 웃는 장면은 없다. 가해자에 대한 몰이로 끝내기에는 피해자와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다. 좁은 교실 안에서계속 바뀌는 관계는 누가 더 옳고 그른지 가치판단을 할 수 없게 만든다. 우리가 생각하는, 아무런 고민 없이 행복하게 등하교하는 일반적인 초등학생의 모습은 전혀 찾을 수 없다. 너무 당연하게, 아무 문제 없이 지나갔을 시간을 다시 돌아가는 경험은 쉽게 할 수 없다. 모든 관객에게 영화 <우리들>은 삶의 어느 순간도 가볍지 않았던 우리 인생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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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북]에 대한 짧은 생각  (0) 2016.06.29


제작사 디즈니의 프로젝트는 동물이 사람의 말을 하는 장면을 애니메이션이 아닌 실사로 구현했다. 이를 위해서 필요한 오늘날의 기술이 한 곳으로 응집되어 만들어진 영화가 <정글북>이다. 블루스크린 앞에서 혼자 연기를 하는 아이를 상상한다면, 눈 앞에 생생한 정글의 모습 자체가 커다란 볼거리이다. 털 느낌까지 살아있는 동물이 대사를 할 수 있게 되면서, 영화는 외계인 없이도 타자를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30년 전의 영화 시리즈를 다시 살린 <혹성탈출>이 있다. 오랑우탄, 아니 "히어로" 시저가 장엄하게 "NO"를 인간에게 외치는 순간. 그리고 인간이 생체실험을 위해 만든 기업 건물, 인간의 편리함을 위해 만든 다리에 시저 무리가 등장한다. 두 편에 걸쳐, 그들은 침입자에서 지배자가 되려 한다

속편이 이미 예정되어있다는 <정글북> 역시 타자에 대한 이야기다. 다만 앞의 예와 달리, 이번에는 동물의 세계에 인간이 태어났다. 인간의 무기(이성)를 이용했던 시저와는 달리, 모글리는 동물의 무기를 가질 수 없다. 대신 도구를 사용하는, '호모 사피엔스' 의미 그대로의 행동을 할 뿐이다. 어엿한 애인이 있는 타잔과는 달리 모글리는 어리다. 즉, 쉬어칸의 말 그대로 어른이 된 모글리는 나무를 베고 동물들을 사냥할 능력을 갖춘다. 모글리를 위협하는 쉬어칸을 영화는 악의 축으로 보지만, 그의 추측에는 분명한 근거가 있다. 당장, 모글리의 아버지로부터 불의 공격을 받아 얼굴에 난 흉터가 있다. 모글리 입장에서는 인간이 생태계를 망치는 악이다. 

<혹성탈출>은 인류보다 능력이 뛰어난 종이 등장하여 지구를 정복한다는 현실적인 공포감이 기반에 깔려있다. 반면 <정글북>에서 가장 문명의 영향을 받지 않은 모글리는 야생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약간의 기만과 함께, 모글리는 영원한 정글의 친구다. 도구를 쓸 줄 알고 불을 발견해도, 모글리는 여전히 동물 무리 안에서 살아간다. 그것이 모글리가 인간의 무기(이성)을 발견하고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음 속편이 시간이 지나 어른이 된 모글리가 정글의 수호자가 되었다는 줄거리라면, <정글북>의 정글은 결국 어린 아이들이 심심할 때 펴보는 플립북처럼 우리 손 안에서 놀아나는 환경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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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에 대한 짧은 생각  (0) 2016.06.30

'지구에서 살아남기'


시간이 지나면 나아진다는

너의 말은 전부 틀렸어

사람들은 다들 어디로 가고 있는데

나는 혼자 조용히 사라지는 중이야


하루 동안 먹은 음식들을

수첩에 빠짐없이 적고 나면

그래도 어지간히 살아있구나 생각해

이만큼 소화할 수 있는 힘이 남았으니까


정작 모두가 잠든 밤에 최대한

깨어있기 위해서 차가운 물을 마셔

이렇게 하면 창 밖의 세상과 조금 더

친해지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하지만 밤은 어둡고 아득해서 

나의 시도는 번번히 실패로 돌아가고

그렇게 지구는 내 편이 아니구나

어제 깨달았던 걸 다시 확인하고 잠이 들겠지


내일은 어깨에 총 대신 카메라를 메고

종잡을수 없는 세상에 상처를 줄거야

나만 아는 순간들을 수첩에 꽂아 놓으면서

방에서 혼자 깔깔대면서 웃어야지


그게 지구에서 살아남는 나만의 방식이야



책장을 덮은 뒤에 처음으로 돌아가니 인용구 하나가 보인다. 

그들은 말했다. "넌 네가 사랑하는 그 사람 때문에 미친 거야." 나는 대답했다. "미친 사람들만이 생의 맛을 알 수 있어."


에밀 아자르, 정확히 말하면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을 쓴 로맹 가리의 소설 <자기 앞의 생>이다. 1980년 총구를 입 안으로 겨누어서 스스로 죽은 작가는 자신에 대하여 더 이상 흥미를 가지지 않는 평론가들을 골려주기 위해서 새로운 이름을 부른다. 1979년에 작성된,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에서 그는 자신을 명명하는 지칭들에 지쳐있었다. 사람들이 에밀 아자르의 정체를 파헤치고 정답 근처까지 와서 헛발질하는 과정이 자세히 노출된 그 글은 <자기 앞의 생>의 각주로 손색이 없었다. 주인공 모모 역시 스스로를 어린 아이로 규정하려는 기성 세대들에게 '무엇을 하기에 어린 나이는 없다'고 잘라 말한다. 모모를 키우다시피한 로자 아줌마는 과거 파리의 소문난 창녀였지만 지금은 늙고 뚱뚱한, 그리고 큰 병에 걸린 여자다. 그녀가 모모의 탄생을 보지 못한 반면, 모모는 그녀의 죽음을 마지막까지 함께한다. 

종종 어른들이 청춘을 보고 젊음이 부럽다고 한탄하듯, 어떤 이는 최악의 상황에 가까워 질수록 생기를 잃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기 앞의 생'은 어떤 상황에서도 무너지지 않는다. 그리고 사랑은 그 사람이 있는 위치로 자신을 낮추는 행위다. 모모는 로자 아줌마를 삶을 연장시키는 병원이 아닌, 그녀의 유일한 아지트였던 지하방으로 데려간다. 우주의 시간에 비하여 우리는 너무 작고 약하다. 탄생은 곧 죽음이다. 우리는 탈선 없이 멈출 수 없는, 죽음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있다. 공포스럽다. 그래서 로자 아줌마의 말, "무서워하는 데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란다."는 우리에게도 가장 진실된 말이다. 사실 나이가 들어갈 수록 어떤 능력이 향상될 리도 없고, 경험이 아무리 많아도 막상 일이 닥치면 처음처럼 다시 낯설게 다가올 수도 있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진다는 정설은 거짓이다.

삶의 의미가 있다면 아마 이유는 없을 것이다.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삶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모모는 묻는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도 살 수 있나요?" 문단 앞의 문장에서 삶은 사랑으로 바뀔 수 있다. 오늘날 사랑이란 단어는 감정을 확인받기 위하여 사용된다. 나 역시 아직 사랑을 생각하면 가슴 한 쪽이 저릿한 감정, 그 사람의 말과 행동에 온갖 말초 신경들이 다 곤두서는 느낌을 떠올릴 뿐이다. 소설 <자기 앞의 생>을 통해서 사랑을 알았다는 말은 곧 진짜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아무 소용이 없어질 것이다. 당신은 나에 따라 쓰임이 달라지는 소모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 자체로 내 앞에 드러나는 생이다. 무용無用의 세계에서 사랑은 서로의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빛과 같다. 사랑은 곧 당신이 된다. 당신은 나와 합일合一 할 수 없지만 같은 공간과 시간을 나눌 수 있다. 사랑해야 할까. 사랑의 어떤 순간들은 이 지루한 삶 속에서 잊혀지지 않는다. 그래서, 사랑해야 한다.







영화 <500일의 썸머>는 시간을 넘나들면서 연애의 시작과 끝을 비교한다. 그녀의 애교점은 벌레 비스무리한 헛점이 되고, 그녀 생각에 온종일 즐거웠던 분수대는 도시 속 가장 쓸쓸한 공간이 된다. 엽서카드 회사에 다니는 카피라이터 톰은 끝내 자신의 일을 거짓 나부랭이로 여긴다. 하지만 결국 '썸머'에 이어서 '어텀'이 돌아오면서, 영화는 톰을 위로한다. (500)일에서 다시 (1)일로, 청량한 팝송과 함께, 짧지만은 않은 인생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일이 반복될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과거의 실수를 반복할지도 모르며, '어텀'이 아직 어떤 여자인지 알지도 못한다. 후속작으로 <300일의 어텀>이 나오고, 다시 또 극단적인 감정을 오가는 작품을 만들어도 우린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사랑은 기꺼이 그 반복을 받아들이고 시작할 용기가 필요하다. 그건 처음으로 관계의 벽을 깨고 고백하는 사람이나, 고백이 향하는 당사자나 모두에게 그렇다.

혼자 있을 때 느끼는 행복과 관계 속에서의 행복은 분명히 다르다. 특히 내가 좋아한다고 말 할 수 있는 단 한 사람과, 기념일을 만들어,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라면. 내 인생 챙기기도 버거운 하루에 남의 안부를 챙기는 일은 얼마나 멋있는지 생각해봐도, 한편으로는 여전히 이 사람의 감정은 나와 같을까 걱정할 것이다. 좋아하는 감정만으로 충분한 단순하고 직결적인 사랑을 하고 싶지만, 우리의 생각을 가로막는 것들이 있다. 그건 우리가 절대 하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만나서 부딪히면 쓰러지는 팽이처럼 각자 자기 삶을 책임지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하여 애를 쓰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도 누구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고백을 주고 받는다. 거기 숨겨진 다양한 이야기를 나는 하나루 묶을 수는 없다. 다만 서점을 돌아다니다가, 요령이 가득한 연애 지침서를 보면서 사랑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위한 책을 쓰고 싶었다. 

책 [그래도, 사랑]을 보면 세상 저기 어딘가에서, 가장 공들인 수기로 보낸 라디오 사연을 훔쳐보는 기분이 든다. 그건 어딘가에서 꽃을 피우려고 노력하는 순간들이 담겨있다. 사랑은 결국 순간의 아름다움을 안고 가는 일인 것 같다. 영원을 약속하는 말보다 지금 너가 있어서 행복하다는 소박한 말이 가진 힘이 더 크다. 어딘가에 사람에 상처 받은 사람들이 분명히 있고, 그 사람들에게 어서 벗어나 연애를 하라는 재촉임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결국 상처를 낫게 해주는 것 역시 사람이기 때문에, 너무 복잡하게 여기지 말고 천천히 내 이야기를 들어보라고, 책은 말한다. 가수 윤현상의 노래 가사처럼, '그것만으로도 기억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


"깨진 접시는 다시 붙일 수 없지만

살아 있는 것들은 달라.

상처가 났던 자리가 다시 붙으면

거기는 더 단단해지잖아.

그런 일은 없겠지만 어떤 일이 있어도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나를 믿고 우리를 믿어."


그것은 출렁거리는 불안의 파도를 잠재우는

마법 같은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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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사랑해야 한다  (0) 2016.04.27

http://20timeline.com/5348   (2016.04.21)



제작진이 최소한으로 개입한다는 점, 자막을 통해 출연진에 캐릭터를 부여하는 면에서 같은 방송사의 <삼시세끼>를 떠올리지만 배우학교는 그 이상이다. 하고자 하는 의욕으로 가득 찬 사람들과 그들을 돕는 절대적인 존재, 그리고 그들의 사회에 타인이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않는 세상. 오직 나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 만들어진 공동체가 예능의 형식을 빌려서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물론 극적인 요소로 학생과 선생 사이에 갈등을 보여주지만, 배우학교는 출연자들과 시청자들을 계속해서 방치하지 않는다. 상호 간에 가진 감정을 털어놓고 화해하는 과정까지 꼼꼼히 담는다. 사람들의 눈을 계속 붙잡아둘 현란한 편집과 자막이 중요한 시대에, 인내를 가지고 출연진 전체를 아우르는 눈을 가진 예능. 성숙한 예능의 등장이다.




http://popupcinema.kr/post/VyoJSrke-   (2016.04.20)



유 : 영화를 소비하는 새로운 문화로 생각을 바꾸면 방향만 다를 뿐이라고 생각해요. ‘efLAB'에서 저희는 영화와 관련해서 무엇이든지 시도할 수 있는 기획팀을

꾸리고 함께 활동하고 싶었어요. 저희가 소비자로써 쉽게 접할 수 있는 건 대중적인 영화고, 생산자 입장에서는 독립 단편 영화가 더 가깝다고 생각을 했어요.


안 : 우리가 생산자에게 쉽게 구할 수 있는 걸 새롭게 소비자에게 전달을 하면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서, 독립영화 상영회를 기획을 했어요. 그리고 이게 어

느 정도 자리를 잡고 나니까, 다른 걸 시도하자는 마음으로 잡지 회의를 시작했어요. 그래서 저희는 두 팀의 활동이 큰 그림으로 보면 다르지 않다고 생각을 해

요. 새로운 것을 익숙하도록, 익숙한 것을 새롭게 만드는 방향의 차이죠.




http://20timeline.com/4805   (2016.02.28)



이 영화에서 불꽃놀이는, 피워내지 못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 감독이 준비한 선물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한 순간에 복잡한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듯, 불꽃놀이는 일상을 다르게 하는 마술이다. 영화 속에서 불꽃놀이는 평범해서 특별함을 몰랐던 곳을 다시 밝혀준다. 내가 잠깐 있던 곳에서, 내가 알던 사람이 누군가와 새로운 인연을 맺고 있다는 사실과, 사랑이 이뤄졌는지 아닌지와 상관없이 사람과 사람이 마주친 것 자체만으로 빛난다는 사실을.

*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소중한 어떤 순간을 함께 했던 사람과 함께 다시 보고 싶다. 바로 옆에 앉지 않더라도, 영화가 끝나고 조명이 밝아지면 그 영화를 어떻게 느꼈는지 나누고 싶다. 아무 말도 없이 그냥 같이 걸어도 괜찮겠다. 다만 영화가 시작하고 끝나는 그 순간을 함께하고 싶다. 다른 그 무엇보다도, 그저 우리 모두가 그 근처에서 그것을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충분할 것 같다.



http://popupcinema.kr/post/Eyb5KoaFl   (2016.02.06)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영화를 보는 차원이 넓어졌어요원래 지식이 전무했다면 예전보다 영화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되어서 좋아하는 감독도 영화도 생겼어요

리고 나아가서 우리의 활동을 확장 시킨다면저는 어떻게 보면 모든 영화가 정치적이라고 보거든요정치를 표방하지 않더라도 정치적인 태도가 있을 수 있

벤야민이 말했듯이 어떤 영화가 혁명적인 영화라고 해도그 영화가 혁명적인 기능을 하기 위해선 그걸 위해선 어떤 수용자가 어떤 태도로 영화를 보는지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이화 시네마떼크도 모극장 활동도 그렇고영화를 함께 상영하고 관람하는 활동을 통해서 대안적인 공동체를 만드는 거잖아요그게 희망

을 품고 혁명을 준비하는 태도가 아닐까 생각해요.




http://20timeline.com/3245    (2015.11.08)



어젯밤에는 대화를 평소에 많이 하지 못했던 동아리 선배와 밥을 먹었다. 요즘 유행하는 과일소주 대신 커피를 마시면서 캠퍼스 근처를 걸었다. 밤이 깊어지고 바람이 차가워질수록, 우리는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까지 말을 했다. 그 근처에 사는 선배와 이렇게 밤중에 이야기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선배에게 카톡이 왔다. 지하철로 통학을 했다면 못 받았을 수도 있는 메시지, 다음에 또 밤에 만나자는 약속.

그러다가도, 사람들 사이의 생활과 관계에서 상처를 받는 일이 생기면, 그땐 기숙사로 일찍 들어오는 대신 동네를 한 바퀴 도는 버스를 혼자 타곤 한다. 이렇게라도 혼자 있는 기분을 느끼면서. 하루를 어딘가에서 소모한 사람들과, 같은 버스 안에서, 다시 마주치지 않을 기약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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